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광야에 생선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이도 없다고 했습니다. 참외도 없다고 했습니다. 부추와 파와 마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기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말했습니다. 21절에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이 말은 뭡니까? 모세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전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은 어떤 손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메추라기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영원한 죽음이 왔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몸을 찢으시고, 죄 없는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손은 보호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한 손 편 팔로 붙드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선한 손이 역사하실까요?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짧지 않은 기적의 손, 구원의 손, 보호의 손을 내미시고 선한 개입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치유를 주십니다. 평강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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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주 행복한 눈빛으로 바라보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때일까요?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의 사람이 되고, 영생의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한 영벌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밤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이었습니다. 8절에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람의 두 가지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람의 신비성입니다. 바람에게는 신비가 있습니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 모릅니다. 바람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람의 신비성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도 똑같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어지고, 고백되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어집니다. 고백됩니다. 누가 하신 것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역사는 아주 신비롭습니다.
둘째로, 바람의 사실성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거듭난 사람은 삶도 바뀝니다. 먼저 주인이 바뀌는 변화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자신이 주인이었습니다.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님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시작이 예수님입니다. 과정도 예수님입니다. 마침도 예수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삶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마땅히 예수님과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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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식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니까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 중에 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리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자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리는 그 사람의 신분, 위치, 권세를 나타내는 기준이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일찍 왔습니다. 상석에 앉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면 상석에 앉았던 사람이 맨 끝자리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10절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자리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며 분쟁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서 높고 낮음을 따집니다. 사람이 교만해서 위 아래를 놓고 분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겸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도 행복하고,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나를 한 단계 더 낮춰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거기서 한 단계를 더 낮추면 겸손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둘째로, 기다려야 합니다. 진짜 겸손은 뭘까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분을 내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 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겸손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겸손을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에게도 겸손을 인정받을 때가 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사울에게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궁극적인 관심은 주님의 평가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나는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겸손한 사람인가?” 아무리 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해도 하나님이 “아니다”하시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 사람은 진짜 겸손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십니다.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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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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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영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는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1절에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수가에 서서”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직접 예수님께 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교회로 와야 합니다. 이곳에서 하니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취해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5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로 인정하시고, 헛수고와 허탕이 아닌 영적으로 알찬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아주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따르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했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눅5:10)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11절에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적인 헌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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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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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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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아버지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행복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행복한 성도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자녀된 모든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한 교회에서, 행복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쳐주는 영적인 원칙과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로, 경외와 복종입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복종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경외하며, 그 예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경외하며, 그 분에게 복종할 때에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되고, 성도는 행복한 성도가 됩니다.
둘째로, 떠남과 만남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했습니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속아서 마귀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보혈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에게서 떠난 자가 되었습니다. 죄에서 떠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교회, 예수님이 왕이 된 성도의 삶에 행복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나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됨입니다. 31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셔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교회가 되고, 행복한 성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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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고 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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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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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먼저 베드로를 부르셨고,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의 동업자였습니다. 안드레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내용과 순서가 완전히 다릅니다. 35절에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두 사람과 함께 섰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자기의 이름을 익명으로 기록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6절에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흥하시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요3:30) 그러니 자기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날 그때에 얼마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던지 정확하게 시간까지 기억했습니다. 39절에 “그 날 함께 거하니 열 시쯤 되었더라.”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안드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즉시 가장 먼저 그의 형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41절에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에게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42절에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그렇게 왔던 베드로가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데려와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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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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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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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목적이 명확해집니다. 삶의 이유와 존재의 근거가 뚜렷해집니다. 내 영광과 유익이 아닌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풍성한 열매와 결실의 인생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셨을까요? 포도나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영적 교훈 때문입니다. 첫째로, 포도나무는 매년 껍질을 벗깁니다. 나무 중에서 매년 껍질을 벗기는 것은 포도나무 밖에는 없습니다. 나쁜 균들과 해충들이 껍질 속으로 들어가서 그 곳에서 겨울을 납니다. 그래서 농부는 포도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그 껍질을 불로 태웁니다. 그래야 그 해의 농사가 잘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뭘까요? 예수님 안에서 껍질을 벗는 것입니다. 죄악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교만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나 중심의 껍질도 벗어야 합니다.열등감의 껍질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각종 못 된 껍질을 모두 벗으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의 껍질도 벗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껍질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있어서 예수님께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포도나무는 매년 가지를 자릅니다. 2절에 “모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제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뭡니까? 가지를 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자르고, 어떤 것을 제거해야 할까요? 성령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교회에는 유익이 되며, 자신에게는 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포도나무는 새로운 가지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포도나무는 새 가지에서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은 오늘,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믿는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오늘 구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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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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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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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사가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는 영적 기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이 외치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결국은 모든 것이 뭡니까? 인자하심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이 가득한 하나님의 돌봄이라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이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은혜와 돌봄과 역사를 베풀어주셨을까요? 첫째로, 절망의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불안을 넘어 우울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우울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울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절망하고 낙심해서 우울의 삶을 사는 것을 “엘리야 증후군”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서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왕상19:5)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둘째로, 상실의 아픔 중에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에서 상실의 아픔이 가장 컸던 사람은 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더 좋게 하셨습니다. 욥기 4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욥을 치유하셨습니다. 욥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셋째로, 죄의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곧 불못의 지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혈의 피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영생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절망 중에 있을 때 찾아오셨고, 상실의 아픔 중에 있을 때 찾아오셨고, 죄의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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