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예수님 속에 계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 속에 계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 속에 계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영광을 보니” 했는데,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본다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제한적인 짧은 의견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은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본다”는 헬라어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라고 합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보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1절에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바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란다는 것은 그의 마음과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이신 것을 보고 믿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보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 그 예수님 안에 무엇이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구속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감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분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받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서 받는다는 것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체험하면 증인이 됩니다. 경험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받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체험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만져주심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충만한 강건의 삶을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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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삶에서 전부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증언을 통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증인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증인은 똑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증인은 많이 배웠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증인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이 있으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최고의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셨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구원 받게 하셨고,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증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증언 때문에 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용기 있게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음을 용기 있게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증인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 그리스도로 증언하면서, 자신은 그 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눅3:16)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기는 쇠해서 없어지고, 예수님은 흥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대한 진짜 증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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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그 곳에 회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나라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때에 회당에 어떤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오더니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24절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악한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고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귀신에게 잡혀서 고통의 세월을 살았던 사람이 자유의 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습니다.
귀신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마귀의 졸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한 마귀와 그의 졸개인 귀신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악한 마귀와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입니다. 악한 마귀와 귀신은 예수님의 이름 앞에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습니다. 또 귀신은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이 멸망을 당할 것도 알았습니다.(24)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와 그의 졸개인 귀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님이 주인 된 사람, 예수님이 왕 된 사람으로 살면 마귀와 귀신은 우리에게 역사하지 못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고 했습니다. 그러자 악한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해방시켰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적이 있습니다.
셋째로, 기도입니다. 악한 마귀와 귀신을 추방하는데 기도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변화산 사건 이후에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면 악한 마귀와 귀신이 쫓겨 갑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와 귀신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해서 마귀와 귀신을 물리치고 교회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지키며, 기업을 지키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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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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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을 추방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9절에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그리고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곳에 누가 있습니까?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1절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손 마른 병은 어떤 것일까요? 손이 말랐다는 것은 신경이나 근육에 손상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정상적으로 쓸 수 없습니다. 손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에게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마른 손이 펴졌습니다. 그의 손에 힘이 느껴졌습니다. 물건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전혀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러면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 때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저들은 마음이 완악했습니다.(5) 그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께 대하여 율법과 전통을 어겼다며 예수님을 해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종교는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켜야 할 율법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규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랑은 없었습니다. 긍휼은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내 것으로 수용하며 함께 울어 줄 자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바리새인들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노하셨습니다.(5)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규례를 깨셨습니다. 세칙을 파괴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규례와 전통이 우선이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축복하며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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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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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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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신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예비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진행과 구원의 완성이 누구를 통해서 될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완성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하고,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이 뭡니까? 전도입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힘껏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영혼을 살려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불못의 지옥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 없습니다.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지 않아서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 끝은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끝은 이러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에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라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담대함도 주십니다. 전도를 명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전도해서 영혼을 살려내시기 바랍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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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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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 때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큰 나귀가 아니고 작은 나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만큼 겸손한 분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예수님께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작은 말 구유였으며, 끝은 십자가였다.” 그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겸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겸손해서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복종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나귀는 힘을 상징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순종을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이나 나귀가 아닌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순한 양 같이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시고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죄악의 짐을 지시는 구주라는 것입니다. 나귀는 전쟁을 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나귀는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는 동물도 아닙니다. 나귀는 멍에를 메고 짐을 지고 가는 동물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짐입니다. 이 죄의 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없애주시는 영적 나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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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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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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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가장 가치있는 최고의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영적인 유통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인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빈 무덤입니다. 6절에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었습니다. 세상 종교를 세운 사람들은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둘째로,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리고 맨 마지막에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박해자였습니다. 핍박자였습니다. 대적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9장 5절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때부터 바울은 전도자가 됐습니다. 교회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교회와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위한 순교자가 됐습니다.
셋째로, 복음서의 기록들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말씀들이 약간씩 다릅니다. 이것은 꾸미거나 조작하지 않고 예수님 부활은 사실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 제자들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 열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제자들 중에서 사도 요한만 빼고는 모두 순교했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전도했고, 그들이 그렇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실재의 사건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그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을 순교자가 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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