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었습니다. 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수고를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못된 마음과 태도를 아시고 1년에 세 번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출23:15)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수장절도 지키라고 했습니다.(출23:16)
오늘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지키는 절기는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광야 40년의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에 정착했습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첫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은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가나안 땅에는 모두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20세 이상 된 사람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일했습니다. 나머지는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살아남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만 해도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첫 수확을 거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 크고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우리는 항상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것을 거두었습니다. 열두 바구니에 가득찼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니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감사하니 풍성하게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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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세 번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8절에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했습니다.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생명과 사망, 복과 화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야 합니다. 신중하게 들어야 합니다.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잘 듣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이 잘 듣는 것입니까? 첫째로, 집중해야 합니다. 들을 때에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집중해서 잘 들어서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전체를 구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라합입니다. 여호수아 2장 10절에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라합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사람을 숨겨줬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 라합이 살았습니다. 가족 전체가 살았습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나를 소성케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들을 때에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며, 마음으로 들을 때에 그리스도의 좋은 편지가 됩니다.
셋째로,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중해서 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집중해서 잘 들은 것 같습니다. 아주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듣는 것으로 거기서 끝입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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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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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물론 예수님도 모든 것을 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의 전지성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나다나엘 사건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뭡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속자이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의 속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험적으로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전지하심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에게 두 가지 영적 유익함이 있습니다. 첫째로,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거룩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정직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른 길, 옳은 길을 가야 합니다.
둘째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사람들은 속여도 예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직의 길을 가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진실의 편에 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용기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이 알아주시고,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면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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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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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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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나다나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48절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러면 왜 나다나엘이 무엇 때문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것일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부분을 해석하며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기도하기 위해서 그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살고 있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형식으로 살았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열정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부정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나다나엘은 사람의 방법으로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나다나엘은 그 길과 방법을 기도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간구했습니다.
특히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완전하게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다나엘은 영적으로 각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준비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다나엘을 보셨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목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장소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하게 간구합니다. 찬송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도와주십니다. 꼭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길과 방향을 가르쳐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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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을 드신 예수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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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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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30세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가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첫 번째로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최대 명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주신 것을 기념하며 기쁨과 감사로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오게 되는데, 많게는 2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성전세는 반 세겔입니다. 반 세겔이면 2데나리온입니다. 성전세는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만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전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환전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또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살아있는 짐승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검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흠이 있다고 하면서 통과를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짐승을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에게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물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때는 아주 비싼 가격에 제물을 사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열여섯 배 이상을 아주 비싸게 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씁니다. 16절에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속에서부터 거룩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3:16-17) 그러면 우리가 들어야 할 영적 채찍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기도와 말씀인 영적 채찍으로 여러분의 몸 된 거룩한 성전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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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을 드신 예수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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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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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것은 구약성경 시편 69편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을 정결케 해서 뭘 회복시키려고 한 것일까요? 성전에서의 바른 제사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온갖 부정과 불법과 거짓과 위선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과연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안 받으십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습니다. 그 채찍을 휘두르며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았습니다. 상을 엎었습니다. 소와 양을 내쫓았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비둘기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 옳은 예배, 참된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은 예배, 치우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고, 정성이 없고, 신령과 진정이 아닌 예배는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성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해야 할 최고의 영광스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바른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거룩한 예배, 정결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그러나 이와 같은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토록 동행하십니다. 참 된 예배를 드려서 그 예배의 자리에 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치유와 회복과 소성함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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