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23 주일설교(요약3)
2025-01-13 09:57:57
박노성
조회수   75

둘씩 보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6:7-13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생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영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서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에 둘씩 보내셨을까요? 첫째로, 법적 증거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둘이라는 숫자는 법적 증거에서 최소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19장 15절에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했습니다.

  함께, 같이 목표를 정하고 전도해서 법적인 거룩한 증인이 되고, 함께, 같이 전도해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혼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전도하면 서로를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위로와 격려는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세운 아주 큰 힘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함께, 같이 기도하고 격려해서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숙을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성숙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둘씩 짝을 지어 보내면서 신앙이 성숙할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인격이 성숙할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짝을 지어서 보내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잘 어울리는 팀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팀도 있었습니다. 잘 어울리는 팀은 감사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팀은 참고 인내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신앙과 인격이 성숙해졌습니다.

 

열두 제자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6:7-13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모두 열두 명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으며,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일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에 전도에 대한 방법과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둘씩 짝을 지어서 함께 보내셨습니다. 7절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둘씩 가게 했습니다. 함께 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할까요? 교회의 공동체성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공동체성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였습니다. 함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같이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같이 전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7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했습니다.

  전도할 때에 만나게 되는 악한 세력이 있습니다. 귀신입니다. 전도는 뭡니까? 마귀의 결박을 부수는 것입니다. 마귀의 결속을 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도자는 반드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기도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러 갈 때에 지팡이만 들고 신발만 신고 가라고 했습니다.(8)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의지하고 가면 예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11절에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전도자를 방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때에 발 아래에 있는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11) 여기서 먼지는 “죄성”, “세속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먼지를 떤다는 것은 “당신의 죄에 나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죄의 사람으로 살지 않겠습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해도 우리는 전도해서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예수님(네팔 선교지 방문 보고)

마가복음 16:15-16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님께 죄사함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 죄인 된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뭡니까?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을 얻습니다. 구원의 유일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이며, 그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교회창립 70주년을 기념해서 해외에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중에 한 나라가 네팔입니다.

  네팔은 남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위쪽으로는 중국, 아래로는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인구는 29,187,037명(2022년)입니다. 네팔어를 사용합니다. 네팔은 87%가 힌두교입니다. 불교가 9%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1.4%입니다. 

  이 나라에서 송현주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송현주 선교사를 통해 미트러교회를 세웠습니다. 2022년 5월 1일에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미트러교회의 현지 목회자는 진 나라얀 목사입니다. 방주 센타는 2022년 7월 5일에 완공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방주센타의 현지 목회자는 가겐드라 목사입니다. 

  네팔이라는 힌두교와 불교의 나라에 하나님의 교회와 방주센타가 우리교회를 통해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며 놀라운 역사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배당을 세우는 것은 멈출 수 없고, 중단하면 안 되는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그러면 언제까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요? 주님 재림해 오시는 날까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입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땅 끝, 온 천하, 모든 사람에게 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더운 여름날의 얼음냉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잠25:13)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8:5-7

  사람들은 값이 많이 나가는 귀중품을 보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보석이 보석이 아닙니다. 진짜 보석이 있습니다. 최고의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각 가정과 교회에 허락하신 자녀들, 아이들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들과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대해야 할까요? 첫째로, 존재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합니다. 영적인 자존감을 세워주워야 합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자녀는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자녀들에게 그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자녀들은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되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악한 사상과 문화에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둘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족에 대하여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아이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게 한 후 바다에 빠뜨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죽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아이를 실족하게 한 사람에게 연자 맷돌을 목에 매게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아이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하여 신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께서 예수님과 어린 아이를 동일시 하셨습니다.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는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 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결례를 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칭찬해야 합니다. 아이를 실족하게 하지 않고, 그 아이를 칭찬해야 합니다. 축복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칭찬은 아주 중요합니다. 축복은 너무 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셨습니다. 축복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아이들을 칭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순종하며 받드신 예수님

누가복음 2:51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효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나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강력한 징계와 심판이 따름도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러면 왜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를 행해야 할까요? 모든 인간의 근본, 출발이 하나님인 것처럼 자녀들의 시작이 부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는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를 행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어떻게 효를 행하셨을까요? 첫째로, 순종했습니다. 열두 살 때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 갔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인들에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존중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셉을 존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요셉과 함께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목수는 힘든 직업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육신적인 아버지 요셉의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요셉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받들었습니다. 51절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받들었다는 것은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섬겼다는 것입니다.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드렸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가정의 생계를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장남인 예수님이 해야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어머니를 돌봐드렸고, 동생들을 이끌고 가정을 세우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훌륭한 효자였습니다. 착한 효자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게 든든한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모를 받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효자, 효녀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시편 128:1-6

  땅 위에 머리를 두고 사는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가정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시편 128편에 있습니다. 

  시편 128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에 부른 노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찬양 속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4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가 먼저입니다.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행복을 주십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야 합니다.

  둘째로, 수고의 대가로 살아야 합니다. 2절에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정당한 노동으로 먹고 사는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힘껏 일하는 사람만이 먹을 권리가 있고, 일하는 사람에게 말할 권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안방이 평안해야 합니다. 3절에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안방은 무엇입니까? 아내입니다. 혹은 가족입니다. 안방에는 아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탁에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며 대화가 오고갑니다.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축복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넷째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성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예루살렘은 지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 교회에 와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32-3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성경의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32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외쳤습니다.

  지금부터 285년전 영국에서 한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영국에서 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그날의 사건을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자신의 죄를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마음이 뜨거워진 웨슬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게 되었을까요? 웨슬리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첫째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웨슬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할 것은 일체 말하지 말며 특히 세속적 이야기를 피하라.” 그는 일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둘째로, 한 책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웨슬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한 책”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책은 성경입니다. 얼마나 그가 성경을 가까이 했던지 사람들은 웨슬리를 “성서벌레”“성서 미치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의 사람이었고, 성경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웨슬리는 하루에 두 번이상 설교했습니다. 많게는 다섯 번 설교했습니다. 53년 동안 400,000킬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2만 이상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네가 할 일은 오직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일을 위해서만 너의 힘을 다하라.” 웨슬리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의 삶, 그의 시간, 그의 힘, 그의 지식을 소비했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막2:2) 그런데 그 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서기관들입니다.(막2:6)

  그때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위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뜯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사람을 보니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치유를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죄 사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죄이며, 그 죄를 사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이 예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분노했습니다. 7절에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분노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종교의 체제를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죄에 합당한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제사장이 받아서 성전에서 잡았습니다. 번제단에 올려놓고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깨고, 부정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껍데기만 있습니다. 형식만 남았습니다. 의식만 있습니다. 가슴을 찢는 회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껍데기만 있습니다. 거기에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님께 진지하게 죄와 허물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 사함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