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21년 주일 설교 요약(종합 5)
2023-12-01 09:56:14
박노성
조회수   49

시험 받으신 예수님 1

누가복음 4:1-4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2)라는 말씀을 볼 때에 예수님은 물도 드시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셨던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광야라는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이 없습니다. 광야는 힘든 곳입니다. 광야는 어려운 곳입니다. 광야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뭡니까?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세상은 쉬운 곳이 아닙니다. 만만한 곳도 아닙니다. 단순한 곳도 아닙니다. 편안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광야는 시험 당하는 곳입니다. 위기를 만나는 곳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고통과 환난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그와 같은 광야 세상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우리가 각종 시험과 위기와 곤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광야에 삼킴을 당합니다. 삶의 실패자가 됩니다. 영적인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절박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40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마귀가 와서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3절에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절박합니다.

  이 시험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이것은 신명기 8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고 마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사는 광야 세상에는 시험이 많습니다. 위기를 만납니다. 그 때에 세상적인 방법이나, 육신적인 길로 가면 광야에서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와 형통을 주십니다.

시험 받으신 예수님2

누가복음 4:5-13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한 세력이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마귀는 아주 집요하게 우리를 시험합니다.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공격했던 마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가지 장소에서 시험했습니다. 첫째로, 광야였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의 절박함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5절에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천하 만국이 다 내려다보이는 꼭대기는 어디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며 그 곳에 서기를 소원하고 기대하는 자리입니다. 바로 성공의 자리입니다. 출세의 자리입니다. 잘 나가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서게 되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좋아합니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고 하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 자리에 섰을 때를 노립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말했습니다. 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삶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경배, 이것이 되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영광, 나를 높임, 나를 즐겁게 함이 되면 마귀에게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전 꼭대기입니다. 9절에“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성전 꼭대기는 어떤 곳입니까? 거룩한 자리입니다. 거룩한 자리에도 마귀의 무서운 시험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 아니냐? 영웅주의를 자극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말했습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교회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영적인 성전 꼭대기에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도 마귀의 시험은 있으며, 물리치지 못하면 시험에 넘어집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29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이 제1순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최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예수님이 가장 먼저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실까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속죄의 어린 양이 되실 수 있을까요? 구약시대에 어린 양을 통해서 구원 받은 엄청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의 장자와 첫 것이 모두 죽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자와 첫 것이 죽는 재앙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예수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마음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혔습니다. 예수님 손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손이 범하는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발에도 녹슨 대못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발로 범한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옆구리에 창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우리 심장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까지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 보혈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해 오실 날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세상을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지금, 현재, 이곳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곳, 이 시간, 이 장소가 내 인생의 삶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진지해집니다. 거룩해집니다. 최선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 받은 구원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교사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7:28-29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했습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영생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참 좋은 교사였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어떤 교사였을까요? 첫째로, 은혜가 충만한 교사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한 교사였습니다.

  둘째로, 진리가 충만한 교사였습니다.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교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어디에 맞추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죽음이었습니다.

  셋째로, 권위 있는 교사였습니다. 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권위는 무엇입니까? 영적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의 속을 아셨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아셨습니다.

  넷째로, 본을 보이신 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이 앞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행함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말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  희생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교사였습니다.  그 예수님처럼 은혜가 충만한 교사, 진리가 충만한 교사, 권위가 있는 교사, 본을 보이는 교사들이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0:22-30

  예수님의 양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수없이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경험하고 자신이 겪었어도 못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8절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누구이실까요?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영생을 주실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으로 입고, 입으로 시인하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영적 기치와 의미가 어디에 모아지고, 어느 곳에 집중되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다른 것을 전혀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 하나 보십니다. 그것으로 하나님나라 천국을 얻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고 믿음 하나 보시고 공짜로 하나님나라 천국을 허락하시고, 영생을 누리게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 것은 자유입니다. 믿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영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영원한 불못의 지옥을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누리는 그 영광, 그 황홀함, 그 찬란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내 생각을 따라가면 겨우 내 수준으로 삽니다. 성경을 따라가면 진리의 세계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 잘 따라가서 여러분이 받은 구원 절대로 놓치지 않고 영원토록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돋는 해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1:78-79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돋는 해라고 했습니다. 78절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말라기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전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리고 430년이 지났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돋는 해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돋는 해이시고, 예수님이 태양이 되신다는 것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항상 중심에 있습니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태양을 중심에 두고 하늘의 천체들이 일정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낮과 밤이 생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모든 것의 중심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돋는 해이신 예수님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영생의 사람입니다. 하늘의 사람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으로 어둠이 물러갑니다. 79절 앞부분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칠흑 같은 어둠이라도 떠오르는 해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해가 뜨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흑암은 힘을 쓰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어둠이 뭘까요? 죄입니다. 그 무서운 죄가 예수님 보혈의 피로 사함을 받습니다. 인생의 어둠도 예수님을 통해서 물러갑니다. 예수님이 주인 된 삶에 광명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으로 치유와 회복을 얻습니다. 79절 뒷부분에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했습니다. 평강은 치유입니다.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치유를 통해서 영혼이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질병도 고치셨습니다. 12년 혈루증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38년된 병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 인생에 엄청난 치유와 회복을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빨리빨리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코로나19도 빨리빨리, 민족 통일도 빨리빨리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돋는 해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손을 내밀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2:9-13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리 손을 내밀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 의지대로 되지는 않지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13절에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니라.”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손을 치유 받아야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그 사람뿐일까요? 아닙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영적인 손이 마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손을 내밀어서 예수님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 것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육신적인 것 붙들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손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손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보혈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대신하는 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것처럼 우리의 손은 섬김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저주와 비난과 비판의 손이 아닌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와 위로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힘든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복하는 복된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손을 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손을 펴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손을 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손을 편다는 것은 인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잠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인색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13:4-15

  우리 몸에는 각각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맨 위에 머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발이 있습니다. 그 발은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부피 면적이 2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발을 하대합니다.

  그러나 발은 우리 신체에서 아주 중요한 지체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몸에서 고생을 가장 많이 하는 부분이 뭘까요? 발입니다. 발은 우리가 걸을 때에 몸무게의 세배를 버텨냅니다. 뛸 때에는 우리의 몸의 일곱 배를 견딥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발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측면에서도 인간의 발은 최고가 아닙니다. 힘의 측면에서도 인간의 발은 최고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발을 주셨고, 예수님께서 머리도 아니고, 얼굴도 아니고, 손도 아닌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일까요? 첫째로, 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통치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바뀐 것일까요? 머리가 바뀐 것입니다.

  머리는 생각과 방향을 주관합니다. 발은 그 머리의 명령을 받아서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발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은 머리 위로 올라가시고, 나는 발로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처럼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문간으로 가서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해서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영적으로 큰 사람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향해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 사람의 발걸음이 머문 곳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예수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님

요한복음 8:51-59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세상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절대로 절망하면 안 됩니다. 낙심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절망하면 안 될까요?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출생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천년 이상을 앞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전부터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전부터 계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이실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구원자이십니다. 51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 예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요, 예수님이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치유자이십니다. 인간으로 사는 모든 인생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질그릇입니다. 인간은 아침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상한 갈대입니다.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 분은 왕이십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분은 평강의 왕입니다.(사9:6) 그러므로 그 예수님은 치유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회복자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8:14-15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계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사역하셨던 곳 중에서 아주 많이 중요한 장소입니다.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삶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 가버나움에 시몬 베드로의 집도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음식을 잘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 왔습니다. 함께 살고 있던 장모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 순간 열이 떨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몸을 회복하고 즉시 예수님을 대접해드렸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들어오실 때에 무슨 일,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집에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불가능이 가능케 됩니다. 안 되는 일이 됩니다. 높은 산이 평지가 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치유의 과정에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셋째로, 섬기는 자가 됩니다. 15절에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열병을 치유 받은 베드로의 장모가 즉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치유를 경험한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위대한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장모는 진짜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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