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 행복과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 |
사도행전 2:46-47 |
인간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입니까? 가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가정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마침도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떠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근본은 가정입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가정입니다. 가정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사건과 일들이 모두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홍수심판 이후에는 노아의 가정을 통해 온 세상에 사람들이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가정과 이삭의 가정과 야곱의 가정을 거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세워주셨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족보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요셉의 가정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의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뭡니까? 사실은 가정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가정의 용어와 분위기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든 가정이 어떤 가정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모두 가정들이 가정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가정이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복된 기도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사랑과 나눔과 축복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왜 가정이 고민과 갈등과 싸움의 자리가 되고 있을까? 그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가정이 사막처럼 웃음과 기쁨과 감사가 없는 황폐한 곳이 되었을까? 그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자로 예수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셔드리고 예배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지시를 따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나라 천국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절대적 권위자가 되지 않고 가정의 아버지가 혹은 아내가 절대 권위자가 되어서 아내 혹은 남편을 정신적으로 압박합니다. 자녀들을 괴롭힙니다. 권위자가 되어서는 안 될 존재가 권위자가 되면 가정과 가족 전체가 고통을 겪습니다. 세상 것으로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각 가정에 예수님이 절대적 권위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인도와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곳에 행복과 평안이 있습니다. |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
요한복음 6:41-51 |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새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0절에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때에 유대인들이 그 생명의 떡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49절에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육신의 양식만 먹은 자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취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51절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이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밥이라는 것입니다. 밥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밥은 생존을 위한 필수 음식입니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꼭 밥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생을 위해 꼭 필요한 분입니다. 둘째로, 밥은 모든 사람이 취하는 음식입니다. 그것처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얻습니다. 셋째로, 밥은 매일 먹는 음식입니다. 어제 밥을 먹었다고 해서 오늘 밥을 안 먹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과 동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밥입니다. 예수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영생이 있습니다. |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
요한복음 8:12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상에 가장 확실한 희망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 주시려고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혼돈과 공허를 물리쳐주시려고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흑암을 몰아내주시려고 광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광명과 영적 질서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에게 빛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로,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됩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어둠이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입니다. 사망입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비관하게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시험과 환난의 담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마침내 이기게 하십니다.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기서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은 현재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가 실제가 될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눈앞의 캄캄한 현실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병으로 누워있는 병상에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기가 막힐 수렁과 웅덩이에 빠졌어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출구를 보며 기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
요한복음 8:12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상에 가장 확실한 희망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 주시려고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혼돈과 공허를 물리쳐주시려고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흑암을 몰아내주시려고 광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광명과 영적 질서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에게 빛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로,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됩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어둠이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입니다. 사망입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비관하게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시험과 환난의 담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마침내 이기게 하십니다.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기서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것은 현재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가 실제가 될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눈앞의 캄캄한 현실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병으로 누워있는 병상에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기가 막힐 수렁과 웅덩이에 빠졌어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출구를 보며 기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
이사야 53:1-6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후 3시에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이 일어난 사건과 일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4절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사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죄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4장 7절에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둘째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를 평화를 누리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받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안이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치유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했습니다. 예수님의 매 맞음으로 우리가 받게 된 것이 있습니다. 치유입니다. 회복입니다. 넷째로, 옳은 길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에“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죄악의 길로 갔습니다. 그런 우리는 이미 벌써 사망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길을 여셨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 |
마가복음16:5-11, 고린도전서 15:57-58 |
예수님의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할 수 없는 아주 확실한 실제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 예고하셨습니다.(막8:31, 9:31, 10:33)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그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꺾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예고하셨던 것이 실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주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큰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승리로 보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승리는 무엇으로부터의 승리입니까? 죽음 곧 사망으로부터의 승리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사망은 영원한 불못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에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허물과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으면 어떤 허물과 죄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이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도의 죽음을 생명과 부활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교회를 위한 우리의 수고와 애씀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하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상급과 면류관을 주십니다. |
승천하신 예수님 |
사도행전 1:1-11 |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땅에 계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4절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분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기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몇 날이 못 되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십니다.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9절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1절에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래도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승천이 왜 중요할까요? 그리고 왜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기독교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승천이 없었다면 예수님 부활사건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그 당시에 예수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수님의 승천이 없었다면 더욱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과 확실성을 아주 강력하게 갖추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제자들을 흔들리지 않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승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환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 예수님 부활의 확실성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곧 뵙게 된다는 기대와 소망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재림해 오실 예수님 |
사도행전 1:6-11 |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땅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복음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복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재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의 재림이 가시적으로, 인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해 오실 때에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맞은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했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성도의 부활입니다. 썩지 않을 몸을 입습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삽니다. 강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신령한 몸으로 삽니다. 영광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해 오실 때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하늘로 올려져서 공중에서 재림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인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입니다. 그러니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최고의 소망입니다.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러면 재림의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일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그러므로 부지런히 주님을 위해 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최선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성실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 곳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 |
마태복음 16:13-20 |
세상에는 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구원의 말씀과 진리를 증거하는 곳은 없습니다. 단 한 곳 오직 교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전하셨던 복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리고 교회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8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반석”은 뭘까요? 반석은 “바위더미”라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반석의 의미는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모든 신앙고백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갖는 최고의 권세와 능력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두 가지입니다. 박해의 세력입니다.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에 교회는 망하거나 세상 세력에 점령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음부의 세력은 지옥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옥의 세력을 이겨내고 영혼이 구원 받고,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 이르는 길과 통로는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 |
마가복음 10:13-16 |
어린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의 부모와 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 13절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4절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 아이들의 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고, 예수님께 어린 아이들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배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상으로 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뭘 배워야 할까요? 하나님나라 천국입니다.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의존성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의존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또 순결성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흡수성입니다. 어린 아이는 복음을 스폰지처럼 흡수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영접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고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셋째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16절에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그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유력한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부모는 가정의 영적 제사장으로 자녀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
효를 행하신 예수님 |
요한복음 19:25-27 |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공경을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살아계실 때에 잘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길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해서 효를 행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효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극진한 효자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 하나님 아버지께 효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효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린 소년 예수님이 부모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2장 51절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받들었다는 것은 거역함이 없이 순종을 잘하는 착한 효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γύναι)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최고의 존칭입니다. 왕의 부인 왕후에게 쓰는 용어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표현을 쓰셨을까요?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위로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27절에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는 어머니 “메테르”(μήτηρ)를 썼습니다. 이것은 자신으로 인해서 어머니 마리아가 많은 고생과 수고를 했으니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감당하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셨고, 그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육신의 부모에게 효를 행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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